테마에세이

내 삶의 출발점, 고향의 새 출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떠올려본다.
도시생활에 진저리를 느낀 주인공은 터벅터벅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눈이 켜켜이 쌓인 앞마당에서 배추를 뽑아 달달한 배춧국을 끓인다.
오들오들 떨던 주인공은 뜨끈한 배춧국을 한 사발 들이켜고야 배를 두드리며 고향집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비로소 살았다는 듯이. 그때부터였을까.
고향은 뜨끈한 배춧국과 같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욱신욱신 아플 때 생각나고, 달짝지근하게 내 몸에 당도를 올리면서도 해롭지 않은 웰빙.
지치고 힘들 때 우리에게는 고향이라는 배춧국이 필요하다.
멈춘 심장의 엔진이 가동되는 뜨거운 기억 한 사발.
우리에게 고향은 늘 그 뜨거운 엔진음, 출발과 맞닿아 있었다.

성남 태평동
부산도시공사가 개최한 집과 도시 사진공모전 수상작 ‘골목과 아이들(조은희 作)’

고향의 의미

고향,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또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면서도 정작 정의 내리기는 어려운 단어다.
고향은 내 과거가 있는 정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형성된 하나의 세계와 같다. ‘공간’과 ‘시간’인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인 ‘마음’이 복합적으로 얽힌 심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리움, 잊을 수 없음, 타향에서 곧장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이라는 면은 공통적이다.
사실 고향의 가장 대중적인 의미는 태어난 장소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인 탄생이며, 고향이라는 장소에서 태어난 것은 지리학적인 탄생이다. 이 때문에 어머니 자궁과 고향은 생의 원천으로 우리에게 각인된다.

역사적 고찰로 본 고향

고향의 의미와 장소는 역사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어 왔다. 먼저 건국신화를 살펴보자. 단군신화의 단군, 고구려 건국신화의 고주몽, 백제의 비류와 온조, 신라의 박혁거세, 석탈해와 김알지, 가락국 김수로왕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이다. 그 혈통을 이어받은 우리의 고향은 어디인가. 바로 고향은 하나, 하늘을 뜻했다.
삼국·고려·조선시대의 고향은 삶 그 자체에 비견되었다. 당시 고향을 잃은 사람은 대부분 외교상의 인질이 되거나 전쟁 중 포로가 된 이들이었다. 나라가 망하는 비운 속에서 적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은 고국과 가족과 고향을 함께 잃었다. ‘생명’을 잃는 것과 다름없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고향의 상실’은 항쟁의 역사로도 읽혀진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의병들은 독립투쟁을 위해 고향을 떠나 만주 등지로 흩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탈향은 고향을 지키고 다시 돌아오기 위한 값진 상실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고향의 상실’은 민족의 큰 아픔과 직결된다. 1950년 6·25 전쟁으로 공산군이 남침하면서 300만에 이르는 북쪽 주민들이 남쪽으로 피난했다. 당시 북한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북 피난민들은 곧 고향에 돌아가리라 기대했지만 남북 사이에 국경선이 놓이며, 영영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이 되었다.

성남 태평동
부산도시공사가 개최한 집과 도시 사진공모전 수상작 ‘성남 태평동(민경현 作)’

고향에 대한 세대 차이

우리나라는 급속히 발전해갔다. 도시화 현상으로 젊은이는 모두 도시로 몰렸고 농촌 인구는 급감했다. 당시 도시에 정착한 세대는 전반기 농촌, 후반기 도시라는 두 가지 경험을 동시에 가졌기에, 명절이면 농촌으로 돌아가는 귀향이 일상화되었다. 때문에 ‘부모님의 고향=시골 농촌 마을’이라는 등식이 자연히 성립했다. 하지만 자식세대에 이르며 고향의 장소는 확연히 달라졌다. 나고 자란 곳이 고향이라면 그들의 안식처는 ‘도시’다. 어린 시절 따스한 장면과 추억이 기록된 도시의 한복판, 그곳이 고향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변한다. 그 흐름 속에 고향의 의미가 달라져왔듯, 고향마을의 모습도 늘 그대로이진 않다. 발전과 개발의 흐름 속에 옛것은 이내 새것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혹여 추억 속의 그림 한 폭을 안고 고향을 찾았다면, 적잖이 변한 그 모습에 당황스러울 수 있다. 환상이 깨어지고 귀중한 보물을 도둑맞은 것 같은 우울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나의 살던 고향은
부산도시공사가 개최한 집과 도시 사진공모전 수상작 ‘나의 살던 고향은(권원욱 作)’

녹산고향동산 조성기

최근 강서구 녹산 주민의 마을도 개발의 시류 속에서 변화를 맞았다. 90년대 조성된 녹산국가산단부터 현재 국제산업물류도시까지 10여 개 산업단지 조성 사업의 영향이었다. 변혁의 10년, 28개(2004년 기준)였던 마을은 9개로 줄었고, 마을이 터를 비운 곳에 새로운 산업도시가 만들어졌다. 범방, 미음, 생곡, 세산, 가리새마을…. 오랜 역사와 기억을 켜켜이 쌓아온 고향 동네가 사라진 것이다.
개발이란 어차피 붙잡을 수 없는 시류와 같다. 그 속에서 고향 동네는 서서히 변화하며 새로운 태동을 겪어낸다. 모습은 변할지라도 여전히 고향의 대지는 어머니 품처럼 새 희망의 씨앗을 품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옛 고향의 역사와 기록은 존재한다.
2015년 3월 녹산향민연대(녹산포럼, 녹산중·세산초등 총동창회 등 13개 협의체)는 부산도시공사에 마을을 기억할 만한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했고, 부산도시공사는 그 의견에 힘을 보태며 본격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9년 4월 비로소 따뜻한 기억을 품은 ‘녹산고향동산’이 주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서낙동강변 1.6㎞ 구간, 전체 면적 6만 5,000여 ㎡로 축구장 9개 크기, 65억 원이 대거 투입된 사업이었다.

녹산고향동산

녹산 주민들의 애환을 위로하기 위해 부산도시공사가 만든 공원이다. 서낙동강변 1.6㎞ 구간, 전체 면적 6만 5,000여 ㎡로 축구장 9개 크기로 65억 원이 투입되었다. 녹산고향동산에는 ‘문화공원’과 ‘녹산고향동산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공원] 강변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녹지공원. 한 가운데 작은 동산에는 고향을 기리는 공간인 망배단과 망배단비, 추억의 벽을 볼 수 있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는 옛 마을 모습을 축소해놓은 모형과 사진 등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옛 녹산면사무소와 초등학교 모습, 강과 바다, 갯벌 등을 재현해두었다.

녹산고향동산의 리스따뜨, 여기서 확인해주세요.
  • ‘녹산고향동산’ 검색, 주차장 총 32면 무료(부산 강서구 범방동7)
  • 버스 강서구 7, 강서구 7-2, 1005, 220, 221 (‘사구’ 정류장 하차 후 10분 도보 이동)
녹산고향동산

고향에서 찾은 안식

녹산 주민들에게 고향은 무엇이었을까. 또 우리에게 고향은 무엇인가.
그 진심에서 시작된 ‘녹산고향동산’ 조성 사업의 성공 여부는 결국 녹산마을 주민들의 마음에 닿았는가에 달려있다. 그들이 이곳에서 고향의 추억을 양분 삼아 삶을 살아내고, 아름다운 기억의 유산을 이어갈 때 오랜 고향의 역사도, 새롭게 만들어진 녹산고향동산도 힘을 낼 수 있다. ‘고향은 사라졌지만 고향은 동산에 살아 있다.’ 아이러니해 보이는 이 문장은 사실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일지 모른다. 우리의 고향은 고정된 피사체가 아닌 시대의 바람에 무수히 변화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언제 변화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기억은 다르다.
그 속에서 고향의 추억은 영원히 변치 않는 화석이며 신념이다. 그 기억이 변하지 않는 한 내 안의 고향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단단한 고향 땅을 딛고 나아갈 우리의 미래와 새 출발의 방향도 안정적일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 주인공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의 한 자락을 곱씹어본다.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리틀 포레스트 속 주인공은 고향의 양분을 충분히 먹은 뒤 생기를 되찾고 당당히 새 삶을 준비한다.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쐬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 우리가 기억하는 한 고향이 주는 안식과 양분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