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스토리

수영강변의 마을 첨단산업단지가 되다

2020년 센텀2지구 그린벨트 해제가 심의통과되면서 옛 모습을 간직해온 반여·석대·반송동이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다.
고향마을의 역사적 고증을 살펴보고 새 출발의 의의를 되새겨본다.

반여·석대·반송동, 첨단산업단지로의 변화

이곳은 반여동을 에워싼 장산(643m)이 우뚝 솟아 있고 앞에는 수영강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지다. 장산은 조선 시대 소나무를 길러 목재자원의 공급지로서 채벌을 금지한 보호된 봉산封山이다. 장산은 민간인도 출입이 금지되어 소나무 숲이 형성되었다.
여러 곳의 너덜겅(돌바다) 밑으로는 항상 물이 흘러 ‘장산은수萇山隱水’로 물이 풍부한 산이었다. 반여동 사람들은 농사일을 천직으로 삼고 자연과 소통하면서 여유 있게 살아왔다. 임진왜란 때 향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서 살았기에 삼절사와 정여각 등 충효의 고장으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순박한 농촌마을이던 반여동은 1960년대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이 시작될 때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공장이 하나 둘 건립되었다.
중리中里마을은 반여동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중리라 하는데, 부유한 농가가 많았다. 유교숭상사상이 짙은 마을이며 남평 문씨, 청도 김씨 등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 마을에 태광산업(반여 1동 850번지)이 들어와 장산숙 서당과 담장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
1960년 후반부터 공장단지가 조성되면서 부터 중리마을 아래쪽에 ‘새로운 마을’이 생겨 신촌新村이라 불렀다. 이곳은 반여동의 상가 중심지로 중리시장이 개장되면서 다방 등 위락시설이 많아졌다. 동양고무㈜, 흥아다이어, 성요사 등 기업체도 이 마을에 자리 잡았다. 옛날 질그릇이나 옹기를 구운 곳이라 고기등古器嶝이란 지명이 붙었는데, 8·15 광복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5, 6호의 농가가 농사로 생활을 이어온 한적한 곳이었다.
6·25전쟁 때 포로수용소가 3년간 있다가 거제도로 이전했다. 고기등마을에는 주민센터, 삼해공업㈜, 성림제강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7~1981년)과 농촌 개발을 위한 새마을운동이 추진될 때, 반여동은 1980년 4월1일 준공업지구(제9630호)로 지정되었다.
무정마을에는 이때 대우실업, 삼립식품, 우성식품, ㈜기린, 성찰사, 한국수출포장 등 공장이 들어섰다. 반여동 서쪽 수영강 건너편의 삼어마을에도 우후죽순처럼 공장이 늘어나 경제 건설의 공장 마을이 되었다. 삼공피혁, 프리나사료, 우성화학, 범양사, 삼화방직 등이 이를 대변한다.
반여동은 50여 개의 공장이 밀집했는데 섬유, 식품, 봉제품 등 기업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여성 근로자가 급증하면서 여초女超 현상이 두드러졌다. 2000년대부터 공장이 하나둘 타지로 이전함에 따라 그 부지가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하며 주거지가 되었다.

반송동 지도

명당의 기운이 서리다 - 반여동

반여동 마을 중 가장 위쪽에 있는 상리上里마을 뒷산 투구봉 밑에는 ‘장군이 지휘하는 장군대좌 명당’이 있었다. 마을 앞 풍산금속(조병창) 관사 자리는 병사들의 놀이터(병락갓), 그 앞에 낮은 대臺는 군량미를 쌓아 놓는 군량대, 장군이 쓰는 인장을 닮은 바위인 인반석, 그 밑을 흐르는 내천이 군량소의 군사 양식이 되는 못이다. 앞쪽으로 마주한 중군진산, 북쪽 석대동의 군마가 달리는 모습을 한 추마산, 회동수원지 동북에 기치산 등이 모두 장군대좌를 두고 붙여진 지명임을 봤을 때, 반여는 대표적인 명당으로 이름 나 있었다.

반여동 상리마을
반여동 상리마을
1980년대 준공업지구에 위치한 삼해공업(현재 대림아파트 자리)
1980년대 준공업지구에 위치한 삼해공업(현재 대림아파트 자리)

# 평천들

조선총독부는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산림 임야 조사 사업을 마친 뒤 1930년대 수영강 제방 사업을 실시했다. 당시 수영강변은 갈대와 웅덩이로 이루어진 철새 도래지였으나, 일본 사람인 평천은 고기등마을에서 왕자 아파트 무정마을까지 제방을 쌓고 큰 들판을 조성했다.
이 작업을 위해 마을 부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정사각형의 농토를 만들고, 지금의 삼어마을 세월교에서 남서방향으로 보(洑, 양쪽 돌을 쌓아 물이 흐르는 개울)를 만들어 농수로 사용했다. 삼어마을에 7대째 살아온 박희진(84세) 씨는 마을 부역인으로 목도를 매고 돌을 옮겨 보를 쌓았고 이곳 명칭이 ‘평천들’이라 증언했다. 일본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소작을 주어 소작료인 쌀을 수탈해간 현장이었다.
광복이 되자 소작인들은 소작해온 농토를 모두 자기 것으로 차지했다. 1980년 준공업지구가 되자 ‘평천들’은 공장 대지로 변했으며, 이후 공장이 이전되면서 주거지로 탈바꿈했다. 당시 성요사 자리에는 롯데아파트, 삼해공업은 대림아파트, 대우실업은 꿈에그린아파트가 자리해있다.

# 부산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남침으로 낙동강 전선인 마산, 대구, 포항 이남만 남았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낙동강 전선의 반격이 이루어지면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포로가 급증하면서 부산, 거제도, 마산 등에 포로수용소가 생겨났는데, 지금 아시안게임선수촌 아파트가 옛 포로수용소 자리다. 당시 논과 밭, 임야 3만 평의 토지를 징발하여 수용소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반여동 고분군

삼어마을은 반여동 고분군이 자리 잡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뒷산인 중군진산과 반여·창신아파트(반여4동 산 345, 345-1번지) 일대는 구릉 언덕으로 청동기시대의 생활상과 가야시대 전기부터 중후기까지 가야고분의 변천상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복천동 연산동 고분군과 아울러 위치적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효자들이 살던 곳 - 석대동

‘석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돌대’라고도 불렀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석대천과 추마산 기슭 대리골에서 흘러 온 하천이 석대교(구 석대 동사무소 앞)를 지나는데, 이곳에 반석이 깔려있는 높은 너럭바위가 있어 ‘석대’라 불렀다. 석대를 기점으로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리(윗마을)마을, 아래를 하리(아랫마을) 마을이라 했다.

석대마을
석대마을

# 영양 천씨 정려각

석대동 일원은 예부터 효자촌이라 불렸다. 석대동 동편 산기슭에 위치한 5효자 1효부 정려각이 그 증거다. 이 비석은 효자 천성태(1717~1789), 그 아들 세모(1739~1810), 손자 술운(1767~1835), 증손 상련(1795~?), 현손 우형(1844~1886) 등 다섯 효자와 우형의 처인 효부 김해김씨 등 석대동 영양천씨 가문의 다섯 효자와 한 효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영양천씨 문중은 매년 5월 5일 정려각에서 향사를 받들고 있으며, 2006년에는 표창 완의문, 효행 청원서와 행정문서 110여 점, 호구단자 120여 점, 교지류 등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는 왕에 대한 충성보다 부모에 대한 효를 더 높이 평가했던 조선시대 효행정책을 알 수 있는 맥락이며, 석대가 효자마을임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다.

# 하리마을(석대동)

이 마을에 정착한 영양천씨는 임진왜란(1592년) 때 조선을 구한 명나라 장수 화산군 충장공 천만리장군의 후손들이다. 병자호란(1636년) 때 조선에 귀화한 명군의 후손을 잡아오라는 명령 때문에 동래 석대로 피난 온 천찬석이 하리마을의 조상이다. 그는 광주부윤, 안악군수, 황주목사 등을 일임했던 화려했던 시절을 잊고 깊은 산골 촌부가 되어 손수 기와를 구워 집을 지었다. 500년 된 이팝나무가 서 있는 영양천씨 종택(반송1동 455번지)이 바로 그곳이다. 1,443평에 안채, 사랑채, 별채, 마구간, 방앗간 등을 갖춘 저택으로 37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여고분1호 주거지
반여고분1호 주거지
1970년대 석대화훼단지
1970년대 석대화훼단지

소나무숲이 터널을 이루다 - 반송동

반송마을은 해운대구 반송2동 1통 지역 일대로 아파트로 둘러싸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반송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 하여 본동, 본리마을, 혹은 웃반송이라고도 한다. 지명인 ‘반송盤松’은 본래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반석이 널리 깔려 있고 송림이 울창하다고 하여 지어졌다. 옛 운봉초등학교(반송 2동 229번지) 일대는 200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터널을 이뤄 한낮에도 촛불을 켜고 지날 정도였다. 지금은 소나무 몇 그루만이 반송마을 입구에 서서 그 옛날의 반송을 대표하고 있다.

# 삼절사

삼절사(반송2동 143번지)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남원양씨 3인인 양지, 양조한, 양통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양지는(1533~1592)는 경기도 광주군수로 부임해 임진왜란 때 성을 지켰으며, 양조한(1555~1592)은 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성내의 정원루에 봉안했다. 양조한의 아우인 양통한(1559~?)은 난을 피해 두 아들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활동 중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호

# 신작로 개통

일제강점기 때인 1931년 동래에서 기장으로 가는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이는 석대의 불근디(반송 석표 왼쪽 옹기골), 새지골, 제공골 등의 돌을 깨서 만들었다. 신작로 개통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신리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마을은 크게 발전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남원양씨가 20호를 이룬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기장으로 가는 도로변이 빌딩과 버스종점으로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반송마을
반송마을
삼절사
삼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