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작가

새로운 시선, 부산의 기록이 되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부산의 도심. 작가의 시선은 도심에 머물렀다가, 나아가 개발로 인해 허물고 흩어지는 부산 외곽의 어느 마을에 닿았다. 시선을 새롭게 바꾸자, 깎이고 닳을지언정 제자리를 지키는 터와 공간과 사람이 보였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본질에 관해 주목하기 시작한 김민정 작가.
글과 그림으로 부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는 김민정 작가의 새로운 발걸음을 담았다.

새로운 시선으로 담아낸 부산의 일상

모든 건축물은 목재와 철,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대상일 뿐이지만, 하나둘 사람이 살고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 의미를 담은 공간이 된다. 그래서 건축물은 때때로 물리적인 변화와 더불어 화학적인 변화도 일으킨다. 구성원 간의 소통 혹은 단절, 경험의 공유 혹은 부재 등 말이다.
김민정 작가는 부산의 오래된 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어느 순간 너무나도 쉽게 잊힐 기억을 붙잡기 위한 것이요, 거창하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 일상의 역사가 되는 곳들에 관한 기록이다.
“저는 서양화 전공이에요. 처음에는 어떤 목적 없이 주변 일상을 그렸어요. 창밖으로 무심코 본 도심 풍경이며 작업실을 오가며 본 일상이 주제가 됐죠.”
일상을 그리다 보니 주로 도시의 건물이 소재가 됐고, 희뿌연 안개가 건물을 둘러싼 형상이 캔버스에 담겼다. 작가가 본 도심에서 ‘개발’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변화는 늘 현재 진행이었다. 그러다 공사 이면(異面)에 있는 집들에 주목했을 때, 작가의 시선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작가의 도전은 새로운 작품세계의 신호탄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사 현장은 대부분 오래된 동네가 있던 터였어요. 그렇게 처음 붓을 든 대상이 부산 동구 좌천동의 매축지 마을이었어요. 그 동네에 가면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 매축지 : 바닷가나 강가 따위의 우묵한 곳을 메워서 뭍으로 만든 땅.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군마 등을 관리하기 위한 대규모 마구간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이 마구간을 칸칸이 개조하여 살았던 곳이다.
매축지 마을은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거쳐 이제는 도심 한 편에 조용히 자리한 동네였다. 섬 같은 동네가 고층 아파트와 대비되어 초현실적인 느낌을 풍긴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묘하게 슬프고도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매축지 마을의 풍경을 담은 여러 편의 수채화와 매축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 개인적으로 느낀 부분은 작가의 첫 독립 출판물인 「도시 속의 섬」으로 탄생했다. 부산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은 또 다른 외곽 마을인 감만동으로 이어졌다
“부산 남구 감만동 일대를 그린 건 감만동 리서치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어요. 부산문화재단의 기획자로부터 감만동 전체 지도를 그려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죠. 곧 재개발이 이뤄질 동네를 다양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취지였어요. 그렇게 탄생한 게 「오래-감만」이에요. 감만동 지도 작업 과정을 모은 책이고, 책 표지를 펼치면 감만동 전체 지도가 돼요. 사라지기 전 감만동의 모습을 담은 의미 있는 작업이죠.”
그렇게 감만동 마을 전체의 형태와 골목길 자리가 한눈에 담긴 모습이 완성됐다. 부산의 오래된 마을이 어떻게 재해석되어 독창적인 기록물로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매축지 마을(입체카드)
매축지 마을(입체카드)
매축지 마을 전경(독립 출판물 「도시 속의 섬」)
매축지 마을 전경
(독립 출판물 「도시 속의 섬」)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문 도전

지난 1년간 작가는 마을이라는 덩어리에서 더 세분화된 대상에 주목했다. 「사라지는 집 2019」이라는 주제로 부산 동래구 온천동 주택에 몰두했다. 주택 하나하나를 주목해 그렸다는 점에서 그간의 매축지 마을, 감만동 마을의 작업과는 달랐다. 선은 더욱 분명해졌고, 대상도 더욱 뚜렷해졌다.
작가의 집들에 대한 기록은 도시의 주거 형태에 대한 관찰로 이어졌다. 수십 채의 집이 모여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고층 아파트, 그리고 과하지 않은 크기로 분절된 형태인 저층 주택. 어떠한 형태가 더 옳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언제든 자연과 가까이 닿을 수 있고 ‘내 집’이라는 안도감은 후자가 더 강렬함이 분명했다.
“아직도 어릴 적 살던 집이 그대로인 분 계신가요? 예전에는 주로 맨션이나 주택 형태의 집이 많았죠.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요. 공간이 사라지면 그 기억도 빨리 사라져요. 추억을 되짚을 수 있는 매개가 없어지는 거예요. 우리는 과거를 안고 현재를 사는 건데, 낡은 것을 뭐든 쉽게 허물어버린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에요.”

감만동 전체 지도(독립 출판물 「오래-감만」)

이것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경험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광안동 맨션이 재개발되면서 작가는 어린 시절을 추억할 공간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우리가 잠시 어떠한 공간을 떠난다고 해도, 공간이 여전히 존재하기만 한다면, 공간은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면서 단단해진다. 그러나 효용성만을 따져 허물어버린 공간은 곧 기억의 부재로 이어진다.
“현재 집들에 대한 기록은 어쩌면 대중과 가까워지는 작업이에요. 도시에서 볼 법한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이고, 누구나 경험할 법한 일들이기 때문이에요. 재개발 지역이나 이주민의 이야기가 전혀 동떨어진 세계의 일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누구나 내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내 공간을 허물어야 하는 일을 겪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작가는 부산의 지금을 더 많이 기록하고, 대중에게 알리고자 한다. 캔버스에 물감이 찬찬히 스며드는 것처럼 작가가 카메라로 간간이 담아두었던 광안동 맨션은 올여름, <집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VR 영상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3차원 입체 영상으로 공간에 직접 들어가 집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에게도 새로운 도전인 것이다.

멈추지 않을 작가의 시선과 새로운 기록

작가는 ‘현재를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현재란 사람, 일상, 나아가 도시 전체를 포함한 함축적인 의미다.
“지금 작업하는 건 방진막에 가려진 도시의 공사 현장이에요. 방진막을 성벽처럼 높게 치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무관심해져요. 공사가 끝나면 새 건물이 들어섰구나 하고 단순히 생각하죠. 우리가 그 너머의 다양한 삶과 사람을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업 중이에요.”
작가는 이제부터라도 도시에 비친 우리 모습과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당부한다. 낡음과 새로움의 조화, 소통의 단절이 아닌 상생, 도시와 사람을 위한 개발…. 개발에 앞서 이러한 부분들을 고민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이 조금 더 유연해지고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확신에서다.
“가끔 작품을 보면서 ‘공사 현장을 왜 그리시나요?’ 하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개발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드리면 깊이 공감하시거든요. 앞으로도 작가로서 제가 사는 도시의 문화재, 공간, 사람 등을 새로운 시선으로 기록하고 소통하고 싶어요. 거창하지 않아도 모든 것은 평범한 일상의 역사이자 미래니까요.”
작가는 현재 부산 초량의 정란각(등록문화재 제330호)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여러 작가들과 협업하여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보전한 문화재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지금, 현재, 부산의 이야기라면 모두 작업물의 대상이 된다는 김민정 작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의 부산이 그의 작품에 담기게 될지 그 끝없는 도전을 기대해본다.

「사라지는 집 2019」
「사라지는 집 2019」
김민정 작가

김민정 작가

개발로 인한 도시 풍경과 주거 환경의 변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유화, 수채화, 설치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도시 속의 섬 2017(부산 동구 좌천동 매축지마을) / 감만동 리서치 프로젝트 2018(부산 남구 감만동)
사라지는 집 2019(부산 동래구 온천장마을) / 영도 봉산마을 리서치 2019, 집의 기억(VR) 2020

2008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대학 서양화 전공
2011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원 미술학과 서양화 전공

김민정 작가의 리스따뜨, 여기서 확인해주세요.
  • @minjung_kim_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