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시장 스토리

이웃서면시장 한 바퀴
추억 그리고 꿈을 파는 시장

코로나19로 시내가 텅비었던 시간,
바다가 사람들은 서면시장과 약속을 했다.
이 위기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가 더 자주 올게요”

서면 1번가를 가로지르는 큰길(서면로)과 돼지국밥 가게가 밀집한 골목(서면로68번길) 사이로 오랜 세월 커다란 덩치를 지켜온 건물이 있다. 산업화 시절, 인근 상권을 휩쓸었던 서면시장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눈엔 그저 오래되어 빛바랜 건물로 비칠 뿐이지만, 전성기 무렵 서면시장은 핫플레이스 그 이상이었다. 장을 보는 아낙들과 근방에서 잘나가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들, 그리고 교복 입은 학생들까지 세대와 계층을 불문한 이들이 몰려들었고 그만큼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진귀한 상품이 오갔다. 시대가 변하며 이제는 그 시절을 추억으로만 간직할 뿐이지만, 시장은 여전히 새로운 전성기를 꿈꾼다. 자꾸만 모습을 바꿔보는 건 그런 이유일 터. 오랜 상인들과 젊은 상인들이 어깨를 맞대고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는 서면시장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봤다.

근대 역사를 따라 흘러온 서면시장의 옛 시간

서면시장의 역사는 부산의 근대화 역사에 맞물려 지금껏 흘러왔다. 현재의 상가건물형 시장으로 준공된 건 1970년. 하지만 시장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현재는 복개(覆蓋)되어 자취를 감춘 동천 주위로 몰려든 피란민 중 일부가 이곳에 임시로 목조건물을 세워 장사를 시작한 것을 그 효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면시장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의 서면은 현재와는 판이했다. 방사형 도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서면교차로에는 부산의 번영을 기원하는 부산탑이 우뚝하게 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현재 롯데백화점 자리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와 부전초등학교가 나란히 둥지를 틀고 있었다. 덕분에 서면시장은 고급 식재료와 공산품을 구매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뿐 아니라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달려온 학생들이 한데 뒤섞여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당시 서면시장 1층은 야채, 과일, 생선, 육류 등의 식자재를 비롯해 꽃, 외제상품 판매점 등으로 가득했다. 한편에선 여전히 서면시장의 명물로 불리는 칼국수 가게들이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의 뱃속을 든든히 채웠다.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서면 그곳은 또 다른 세계였다. 한복, 양장, 포목 등 값나가는 상품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부자시장이라는 별칭이 괜한 말이 아니었을 정도로 좋은 상품들이 들어왔고, 이를 구매하기 위해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만드는 속도보다 팔리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로 시장이 대호황을 이루다 보니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상인들 간의 싸움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시장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행복했다. 치열한 삶이었지만 그만큼의 보답이 뒤따랐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은 모두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데에 썼다. 중등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이건만 상인들은 억척스레 모은 돈으로 대학까지 무사히 보냈다. 화장실 갈 시간까지 참아가며 일한 보람은 충분했던 셈이다.

서면시장에 찾아온 위기 그리고 변화

이처럼 1980년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면시장에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온 건 1990년대 중반이다. 인근으로 대형 백화점이 잇달아 들어서며 상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몇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것이 큰 위협이 됐다. 사람들에 떠밀려 다녔던 시절이 무색하게 서면시장을 찾는 발길이 점점 뜸해지면서 자리를 떠나는 상인들이 생겼고, 그 빈자리는 저렴한 임대료를 보고 찾아온 새로운 상인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온 서면시장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다.
우선 1층은 식재료를 팔던 상인들이 일부 퇴거하고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내놓는 식당이 늘어나면서 장터보다는 대형 먹거리센터로의 모습으로 주목받고 있다. 각종 찌개·탕, 분식, 돈가스, 중식 등 다채로운 메뉴를 맛볼 수 있는 데다 가격까지 저렴해 점심시간이면 인근의 직장인들에게 특히 인기다. 서면시장의 역사 그 자체인 칼국수 가게들은 그 수는 현저히 줄었어도 옛맛을 잊지 못해 중년이 되어서도 꾸준히 찾는 이들이 많다. 학창시절의 그리운 추억이 밴 탓인지 저 멀리 해외에서도 종종 찾아온다. 가게에선 여전히 옛 시절 사용하던 제면용 칼이며 다닥다닥 엉덩이를 붙여 앉아야 했던 긴 나무의자까지 사용하고 있어 옛 추억이 물씬 느껴진다.
한편 1층 외부에 입점한 철학원과 타로점 가게 역시 새롭게 찾아온 변화 중 하나다. 장을 보거나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이따금 여유가 날 때면 이들을 찾아 고민을 나누며 답을 구한다. 쥬디스태화 부근의 점집 골목에 비하면 손님의 연령대는 좀 더 높은 편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지나는 곳이다 보니 환전소의 모습도 눈에 띈다.
2층은 한복, 포목을 판매하는 곳들이 일부 빠지면서 그 빈자리를 옷수선 가게들이 채운 상태다. 이외에도 1층 점집보다 더 오랜 세월을 자랑하는 철학관 너덧 곳을 비롯해 커튼, 뜨개방, 속옷, 조명 상점 등이 늘어서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서면시장과 상인들이 동고동락한 지도 벌써 50여 년이다. 가게와 함께 나이를 먹어온 상인들의 얼굴 주름 사이로 시장의 지난 세월이 촘촘히 새겨져 있는 듯하다.

또 한번의 전성기를 꿈꾸는 서면시장 사람들

지난 2018년, 서면시장은 침체된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청년상인들에게 2층 공간 일부를 저렴하게 임대해 시장 내 젊은 층이 유입될 수 있도록 변화를 준 것이다. 더 발랄하고 경쾌하게 변신한 이 공간의 이름은 온나몰(ONNA MALL). 젊은 상인들이 입주하면서 서면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훨씬 다양해졌다. 그동안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20, 30대가 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대부분은 2층 온나몰로 이어지는 계단을 찾지 못해 빙빙 돌며 헤매는 경우이지만,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시장과의 접촉시간이 늘고 그만큼 익숙해졌을 것이다.
온나몰로 인한 변화는 또 있다. 청년상인들을 통해 유행을 파악한 터줏대감 상인 일부가 판매 품목에 변화를 주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상인들 역시 오랜 세월 한 자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선배들을 보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세대가 다른 만큼 사고방식도 달라 때론 견해차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 또한 모두 열심히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기에 이제는 이해하는 마음이 더 크다.

지난해 말, 서면 상권에는 작지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서면시장이 위치한 서면1번가와 쥬디스태화 인근을 가르는 기준이 됐던 서면 중앙대로에 BRT(중앙버스차로제)가 도입되며 횡단보도가 생겨난 것이다. 지상으로 편안하게 거리를 오갈 수 있게 되면서 서면시장 앞을 지나는 유동인구도 크게 늘었다. 교통 문제로 쪼개져 있던 상권이 거대 권역으로 합쳐지며 생겨난 변화다. 덕분에 시장 상인들은 문전성시를 이뤘던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부지런히 가게를 지켜나가고 있다.
부산을 타고 흐른 현대사의 한 자락을 장식하며 그동안 사람들에게 따뜻한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어온 서면시장. 앞으로는 누군가의 과거가 얽힌 장소를 넘어, 여러 세대가 왁자지껄하게 어울리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장소로 거듭나길 바라본다.

서면시장 3세에서 서면시장 회장으로

(사)서면시장번영회 최민준 회장

서면시장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어머니가 서면시장에서 꽃집을 하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들락거리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일손을 거들게 됐습니다. 잠시 도울 요량으로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20여 년이 훌쩍 지나더군요. 지금도 1층에서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어떻게 번영회 회장직을 맡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서면시장은 제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이나 다름없어요. 어머니와 저뿐 아니라 조부모님께서도 여기서 가게를 하셨거든요. 식당을 운영하셨는데 아마 시장이 만들어졌을 무렵부터 시작하셨을 겁니다. 시장의 전성기를 온 가족이 기억하는 셈이죠. 그래서 더욱 시장을 찾는 분들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동안 상인으로 일하며 느꼈던 부족한 점들을 개선할 겸 시장을 변화시키기 위해 회장직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서면시장에 얽힌 유년시절의 추억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롯데백화점이 생기기 전 서면시장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셨는데, 커다란 포대 자루를 가져오셨더군요. 궁금해서 안을 들춰봤더니 포대 자루 가득히 돈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만큼 장사가 잘 된 거죠. 다른 가게들도 상황은 비슷했을 거예요. 그땐 그 정도로 시장경기가 좋았습니다.

번영회장으로서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잖아요. 아무래도 의견 차이를 조율하고 해결해야 할 때 어려운 점이 많죠. 상인들은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거든요.
그리고 청년몰 온나에 입점한 젊은 상인들의 경우 세대가 다르니 기존 상인들과 사고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결국 잘 하려다 보니 생기는 문제라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면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기를 바라시나요?

지난 몇 년간 많은 전통시장이 현대화 사업을 거쳤습니다. 깨끗하고 편리해야 손님들이 계속 찾고 싶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겠죠. 특색이 있어야 호기심이 생기니까요.
서면1번가는 외국인들도 많이 지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건물이나 기타 내부 콘텐츠에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를 잘 녹여내 관광명소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킬 수도 있겠죠. 그동안 시장은 물건을 판매하는 장소였지만 이제는 체험적 요소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