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역, 일광역
빛의 역 일광. 1935년 10월 삼성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이후 1949년 일광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5년 무배치 간이역이 되었고 2009년 4월, 동해선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되면서 옛 역사가 철거되었다.
일광역은 동해선 일광역으로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동해선 일광역의 의미는 단순한 전철역 개통이 아니었다.
일광이 부산 도심과 닿는 시간이 단축된 만큼, 도심 성장의 미래도 더 가까워졌다.
비로소 진짜 빛을 가져다주는 ‘일광(日光)역’이 된 것이다.

반농반어 어촌마을
일광은 전형적인 반농반어(半農半漁) 어촌마을이었다. 남자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여자들은 육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어촌은 농사지을 땅이 넓지 않아 언덕 부근에 있는 자투리 땅에 밭을 일구었다. 여인 중에는 해녀가 되어 바다에서 미역, 다시마, 전복 등을 따서 생계를 잇기도 했다. 일광해변의 수석을 채취해 수석집을 여는 이도 많았는데, 이천리에서 이동항까지 다다르는 길마다 아름다운 수석이 즐비한 덕분이었다.


비밀과 전설을 간직한 당산나무
옛날부터 크고 오래된 나무 곁에는 사람이 모였다. 약속의 장소이자 소망을 기원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천마을 낮은 계단 위 언덕에는 성황당이 자리해 있다. 그 주변으로 2~300년은 됨직한 거목들이 숲을 이룬다. 성황나무는 같은 품종으로 심는 것이 보통인데, 특이하게 이천리에는 느티나무, 팽나무, 말채나무 3가지 품종이 어우러져 어깨를 나누고 있다. 오래 사는 느티나무는 대표적인 당산목이고 팽나무는 갯바람에 잘 견디는 나무이며 말채나무는 지네가 피하는 나무이기에 심었을 것이다. 제각기 자신의 역할을 든든히 해내며 세월을 견뎠을 거목들의 풍경.

느티나무 아래 단단한 둥치에서 삶을 오롯이 감당하며 살아냈을 간절함과 억척스러움을 보고, 하늘을 향해 뻗은 팽나무 가지에서 바다로 사랑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했을 갯마을 여인들의 애절함을 느낀다. 울퉁불퉁한 마디마다 갯마을의 수많은 비밀과 전설을 품고 선 거목의 굽이굽이가 더없이 경이롭다.
집의 구조와 형태
일광의 집들은 신·구의 매력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옛 가옥의 뼈대는 그대로 두고 지붕만 신식으로 바꿔 단 집들이 많고, 옛집들 사이에 도로가 나면서 옛집과 새집의 출입구가 다른 곳도 있다. 그런가하면 이천리 바다 앞 오래된 집들 앞에는 군데군데 돌담이 쌓여 있다. 모래와 자갈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졌을 옛 집들이다. 그 시절에는 파도가 조금만 쳐도 집 앞마당까지 바닷물이 올라왔을 테다. 소설 <갯마을>에 나오는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이란 표현에서 당시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바다 곁의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었을 돌담. 세월이 흘러 이제 그 집 앞에는 파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콘크리트 매립 제방이 만들어졌다. 돌담은 일을 잃었지만 그 흔적만은 옛 전우처럼 남아 정다운 정취를 자아낸다.


소설 속 갯마을 이야기
일광은 오영수 작가의 소설 <갯마을>의 무대이며, 영화 갯마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로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갯마을> 속에는 바다에 남편을 빼앗기고 억척스럽게 살아낸 갯마을 여인들의 한 맺힌 삶이 담겨 있다.
특히 일광 이천리 해녀복지회관은 갯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다. 열 살 때부터 잠수를 배운 해녀의 딸, 물일에 능했던 주인공 해순이가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최백호의 낭만이 담긴 소라다방
일광에서 나고 자란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이는 가수 최백호다. 그의 히트곡 ‘낭만의 대하여’를 곱씹어보면 ‘밤늦은 항구 선창가에서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라’는 구절이 나온다. 항구가 있던 옛 일광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궂은 비 내리는 날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색소폰 소리를 듣던 다방도 일광에 있었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던 ‘소라다방’은 수년 전 문을 닫았지만 이천가화교 등 일광을 걷는 길마다 가수 최백호의 자취를 밟을 수 있다.

빼어난 정취의 일광해수욕장과 삼성대
일광해수욕장의 풍경은 기장 8경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 과거에는 해안선을 따라 노송숲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고려시대부터 정몽주를 비롯한 성인들이 유람했던 절경 중 하나였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 있는 둔덕인 ‘삼성대’는 세 명의 성인이 경치에 반해 풍광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삼성대는 ‘샘섟대’가 그 어원인데, 샘은 약수샘, 섟은 배를 매어두는 곳을 말한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진귀한 약수가 솟았다고 전해지는 만큼 귀하게 여겨진 곳이다.


삼성대 표지석 옆에는 고산 윤선도가 지은 2수의 시 <증별소제(贈別少弟)>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기장 바닷가에서 귀양살이하던 그가 동생과 만나 헤어지는 절절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네 옷자락에 뿌려지며 점점이 아롱지네.
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 해이니
헤어지는 사람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
- 고산 윤선도 <증별소제> 중


일광을 다시 찾게 하는 맛
찐빵과 열무국수
일광 이천리는 손맛이 좋은 동네다. 이천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값싸고 맛좋은 찐빵집이 모여 있다. 찐빵과 만두 모두 반죽부터 속 재료까지 손수 만드는데, 식감이 뛰어나고 푸짐한 소를 꽉 채워 입안 가득 베어 물면 금세 행복해진다. 예전에는 더 많은 찐빵집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호찐빵, 일광당, 천지 바로 손만두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찐빵집 바로 맞은편에는 ‘백종원의 3대 천왕’에 출연했던 열무국수 맛집이 있다. 열무김치가 통째로 나오는데, 가위로 듬성듬성 썰어 국수에 올려 먹으면 새콤달콤한 국물과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기가 막힌다.




일광의 바다 향
일광 바다를 걷다보면 어느새 바다향 그득한 해산물 요리 생각이 간절해진다. 일광역 인근에는 복요리 전문점으로 유명한 ‘일광대복집’이 있다. 오래된 동네 맛집이지만 동해선 개통 덕에 더 유명해졌다. 뜨끈뜨끈한 복국을 호호 불며 떠먹으면 깊은 속까지 온기가 돈다. 보약을 한 사발 들이킨 기분이다.
동해선 개통 탓에 자리를 옮긴 ‘미청식당’도 빼놓을 수 없는 맛집이다. 흰밥 위에 성게알을 듬뿍 얹어 비벼 먹는 성게비빔밥(앙장구밥)은 일광의 바다향을 입 안 가득 선물한다. 일광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맛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