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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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아픔을 딛고 미래로 날아오를
뜨거운 이야기의 섬

부산에서 가장 큰 섬, 가덕도. 그럼에도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가덕도는 최근 신공항 예정지로 지목되며 세간의 중심이 되고 있다. 가덕도가 신공항이 되면 지금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섬 남쪽으로는 활주로가 건설되고 나머지 지역에는 배후시설이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덕도는 그저 사라지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이다.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역사와 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자부심이 동시에 남겨진 곳. 외양포 마을, 대항항 인공동굴, 천성진성 등 가덕도 곳곳을 걸으며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해설 l 배종진·조유례 해설사

시간이 멈춘 마을 외양포

부산에 이런 곳이 있었을까. 외양포 마을의 시간은 1905년에 멈춰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해안선을 따라 자리한 평온한 어촌마을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생경한 풍경에 발길을 멈추게 된다. 낡고 오래된 일본식 집들과 옛 우물터가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외양포 마을의 이야기는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대한해협의 군사거점을 확보해 러시아 발탁함대와의 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대한해협의 길목에 위치해있고 러시아군에게 발각되지 않을 요새 같은 지형을 가진 곳. 이 모든 요건을 충족하는 곳이 바로 가덕도의 작은 어촌마을 외양포였다. 일본군은 곧바로 외양포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낸다. 끝까지 저항하던 주민들 앞에서 평생 살던 집과 세간을 모두 불태웠는데 그 모습을 목도하며 고향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외양포 마을 곳곳에 서려있다.

일본 진해만요새사령부의 요새

마을 주민들을 쫓아낸 일본군은 마을 전체를 군부대로 만들었다. 마을 내에 거대한 포를 설치하고 화약고와 군 막사, 산악 보루, 창고 등의 군사시설로 가득 채웠다. 특히, 마을 북쪽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는 5~6m의 흙 제방을 진지 주위로 둘러쌓아 외부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포대진지를 설계했다. 이 숨어있는 요새 안에는 포 발사대, 화약고, 상황실 등을 지었다. 외양포를 둘러싼 각 봉우리에도 관측소와 초소를 만들어 해상공략에 대비했다.
포진지 뒤쪽 국수봉 일대에는 적함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관측소와 방어초소를 설치했고, 포진지와 관측소 사이에는 갈지(之)자로 말길을 만들었다. ‘말길’은 말을 이용해 군 인력과 탄약 등을 관측소까지 실어 날랐던 길이다. 이렇듯 일본군은 외양포를 완벽한 군사 요새로 만들어 진해만으로 들어서는 러시아 함대를 포격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1905년 진해만요새사령부가 외양포 마을로 옮겨오며 일본의 군대 규모는 더욱 커졌다. 당시 건설한 우물이 8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800~ 1,000여 명의 군인이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지붕 세 가족? 외양포 지붕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고 돌아가자 마을주민들은 다시 외양포로 돌아왔다. 당장 살 곳이 없던 주민들은 남아있던 군부대시설을 거주지로 삼았다. 당시 23여 호의 군부대시설이 있었는데 요새 사령부 건물, 헌병대막사, 무기창고, 장교사택, 사병내무반 등이었다. 주민들은 제비뽑기로 시설을 분양받았는데 뽑기를 잘한 사람이 더 좋은 시설에 입주했다고 한다. 규모가 큰 시설은 분할 임대 해 한 건물을 여러 가구가 나누어 쓰기도 했는데, 한 건물의 지붕색이 2~3개로 제각각인 이유다.
외양포 방파제 앞 낚시점 건물은 당시 헌병대막사 자리다. 부대 내 치안을 담당했던 곳이라 지금도 건물 지하에는 격리시설인 감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매점 바로 앞 큰 일본식 기와집은 당시 무기창고로 쓰이던 건물. 목조건물의 외부에 함석을 덧대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창문 위 눈썹지붕도 일본 고유의 건축양식이다.

조선 징용자들의 아픔이 서린 곳, 인공동굴

가덕도 대항 포구에서도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항항 해안 절벽에 있는 정체불명의 동굴들은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동굴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일본을 공격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이곳 해안에 동굴 요새를 구축했다. 최근 해안 절벽 앞으로 데크를 놓고 동굴 내부에 조명을 설치해 당시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크고 작은 동굴은 총 다섯 개다. 동굴에서는 일본 군사 요새임을 상기시키는 커다란 대포 모형과 당시 굴착작업을 하던 조선 징용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인에게 강제로 끌려와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생생히 살아 숨 쉰다.

쉬이 닿을 수 없어 아쉬운 가덕도 등대 & 동백 군락지

가덕도에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명소가 두 곳 있다. 그 중 하나는 부산시유형문화재 제50호로 1909년 불을 밝힌 가덕도 등대다. 2002년 새 등대를 세우기 전까지 100년 가까이 거제와 진해만을 오가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지만, 조선 수탈을 위해 드나드는 일본 선박의 안전을 위해 세워졌다는 점에서 역시 슬픈 역사의 잔재다.
하지만 근대 서구 건축의 양식, 건축재료, 의장수법 등이 사용된 독특한 건물로 상당 부분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건축사적 가치를 지닌다. 군사보호구역 내에 있어 4일 전에 출입 허가를 받아 관람하거나 미리 숙박 예약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또 하나의 명소는 국내 최대 동백 군락지다. 외양포 마을 뒤 24만㎡ 면적에 150여 년이 넘는 동백 수만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동백과 바다의 조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나 역시 군사보호구역 내에 있어 들어갈 수 없다. 쉬이 닿을 수 없어서일까. 더 아련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가덕도를 품게 된다.

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을 막아낸 자부심, 천성진성

사실 가덕도는 일제 수탈의 아픈 기억만 남겨진 땅은 아니다. 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을 이겨낸 자부심의 섬이기도 했다. 대항에서 가까운 천성마을에 남아있는 천성진성이 그 증거다. 가덕도는 예부터 부산과 진해로 들어오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한 길목이었다.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과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이곳에 진영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바닥 쪽으로 돌덩이를 채워 군함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수군이 주둔할 수 있는 천성진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천성진성은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을 지휘할 당시, 중간기지로 활용되며 승리를 이끌고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시 성벽의 둘레는 약 700m 정도로 짐작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둘레는 약 96m, 높이는 3.5m이다. 남아 있던 성곽과 성터는 농지로 이용되다 현재 복원 중에 있다.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들 사이에서 우리 터를 든든히 지켜낸 가덕도의 자부심이 되살아나는 지점이다.

신공항 건설이 계획대로 이뤄진다면 대항과 외양포, 새바지는 모두 활주로 건설로 사라지게 된다. 일제의 생채기가 지워지고 그 위에 새롭게 그려질 희망의 불씨를 틔워본다. 하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했던가. 가덕도가 품은 아픈 역사의 흔적들은 사라지겠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결코 지워서는 안 될 장면들이다. 복기하고 복기해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오늘 가덕도를 걸어본 결실이리라.

과거를 딛고 희망으로 나아갈 부산의 가장 큰 섬,
신공항 건설로 훨훨 날아오를 가덕도의 미래를 응원한다.

문화관광해설 활용법 10인 이상의 단체라면 주말, 주중 상관없이 문화관광해설사의 관광지 설명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주말에는 가덕도 지양곡주차장, 가덕도 외양포포진지에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해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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