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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대표적인 산복도로 마을, 아미동
지하철 1호선 토성역에서 출발해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다보면 부산의 대표적인 산동네, 아미동에 다다른다. 산자락을 휘감은 알록달록한 집들과 그 사이를 미로처럼 잇는 골목, 비탈진 도로를 마치 곡예하듯 오가는 버스, 부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까지…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아미동의 모습이다.
과거 ‘아미골’이었던 이곳은 개항 이후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의 ‘곡정(谷町)’, 일본 말로 ‘다니마치(谷町)’라 불렀다. ‘곡(谷)’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부산 거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던 연유다. 당시 아미동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일본 순사의 칼을 빼앗아 내팽개칠 정도로 저항적이었다. 그런 주민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일본 순사들은 다니마치에 산다면 무조건 뺨을 때릴 정도로 심한 핍박을 일삼았다. 그런 중에도 아미동 사람들은 어른아이 구별 없이 사는 동네를 숨기지 않고 말할 만큼 항일투사에 가까웠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비석문화마을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일본이 패망하자 서둘러 돌아간 일본인들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묘지들은 아미동에 그대로 남았다. 삶은 어디서든 계속된다. 그곳이 설령 누군가의 죽음 위라고 해도. 해방 이후 부산항을 통해 입국한 귀환 동포들의 상당수가 부산에 정착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란민이 끝없이 부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광복 당시 28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가 휴전 후엔 110만 명을 넘어설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로 인해 부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제 몸 하나 뉘일 곳을 찾아 산으로 떠밀려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미동에 터를 잡은 이들에게 묘지는 더없이 훌륭한 집터였다. 상석은 축대와 바닥이 됐고 비석은 기초와 기둥이 됐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피란수도 부산의 심장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가면 꼬불꼬불 이어진 경사진 골목사이에 비슷비슷한 모습의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막과 판잣집은 시멘트 집으로 바뀌었지만, 마을의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골목을 따라 거닐다 보면 가스통 밑, 놀이터 계단, 수돗가 등에서 일본식 연호가 써진 비석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입구에 자리한 ‘묘지 위 집’이다. 묘지터를 집의 축대로 그대로 활용한 집인데, 형태가 비교적 잘보존된 편이다. 묘지 위 집을 비롯해 비석문화마을 입구에는 당시 지어진 주택 몇 채를 모아 조성한 피란생활박물관이있다. 어린 석이와 미야의 시선으로 고등학생 삼촌 방, 주방, 좁은 골목에 자리한 구멍가게와 이용원, 사진관 등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한 곳이다.
가난했지만 슬프지 않았던 시대
과연 그 시절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없었을까. 귀신보다도 무서운 것이 바로 생(生)이었던 시절, 그때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이다. 황해도 출신이었던 그는 부산에 살면서 자갈치 시장을 주요 작업 무대로 삼았다. 아미동의 복합문화공간인 아미문화학습관 2층에 가면 최민식갤러리가 있다. 그의 대표작과 작품집, 그리고 손때 묻은 유품까지 작지만 알차게 꾸며져 있다.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열정적으로 렌즈에 담았다. 최민식 갤러리에서 고단했지만 치열했던, 가난했지만 슬프지만은 않았던 그 시절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산농악의 발상지
아미동과 감천동을 잇는 반달고개 밑에는 대성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백중(음력 7월15일)때마다 제사를 올리며 산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 일본인 혼령들을 위로한다. 이처럼 생과 사가 교차하고 아픔과 치유가 엇갈리는 곳에서,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성격의 농악이 발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아미동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아미농악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으로 쇠퇴하였다가, 이를 기초로 1952년 아미농악단이 창단하게 된다. 이것이 1980년 지정된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 ‘부산농악’의 시초로 꼽힌다. 대성사는 부산농악의 태동지이며, 대성사를 창건한 김한순 스님은 부산농악의 원형을 보존하고 후학을 양성한 주역이다.
아미동에 부는 새로운 바람
지난 2010년 시작된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의 영향으로 아미동 마을 곳곳이 새롭게 태어났다. 아미문화학습관, 기찻집 예술체험장 등 마을공동시설이 생기면서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을 사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 거점이 되는 곳이 바로 아미골행복센터다. 아미농악을 전승·보존하는 장소이자, 아미농악 체험 프로그램·숲 생태 체험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이다. 최근 아미동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아미4 행복주택인 ‘경동 포레스트힐 행복주택 아미’가 지난 10월부터 입주를 시작한 것이다. 노후 건축물이 밀집한 아미동 일대의 거주환경을 개선하고 주거 안정을 위해 시행된 공공임대주택 사업으로, 4개동 767세대 규모다. 인구감소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아미4 행복주택은 젊은 층의 유입은 물론 마을에 새로운 활기를 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원도심의 활력 증진 및 구매력 있는 젊은 층의 유입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추진되었습니다.
위치 : 서구 아미동2가 237-237번지 일원부산의 피란수도 흔적을 찾아
부산광역시 서구에 있는 아미동은 서구와 사하구의 경계를 이루는 구릉성 산지인 아미산(162.4m) 부근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곳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22년 부산시의 첫 번째 등록문화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