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부산여행 체험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한 나와 대학교를 입학한 내 친구에게 새출발의 설렘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근무 중 반쯤 죽어가는 모습으로, 내 친구는 공강 시간을 빌려 연락하고 있었다. 외계인과 대화하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대화만을 하다가 이러지 말고 여행이나 가자는 생각으로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둘 다 야구를 좋아해서인지 여행지는 구도(球都) 부산으로 단번에 결정났다.
여행의 낭만은 아무래도 기차라는 일치된 의견에 따라 기차를 타고 떠났다. 계획형 인간인 둘이 티켓만 예매하고 떠난 정말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말로만 듣던 서면으로 이동해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야구가 끝난 뒤 불꽃놀이를 즐기다가 남포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갈치시장이 문을 닫은 뒤였다. 그래서 급하게 마트에서 마감 세일을 하는 유부초밥과 술을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가는 길에 스티커 사진이 있길래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꾸몄던 기억이 난다. 호텔에서 계획이 틀어져 유부초밥과 과자가 전부이지만 맥주를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던 그날의 밤도 아직 생생한 듯하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그래도 부산에 왔으면 바다는 한 번 보고 가야지’라는 마음에 광안리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광안리 바다는 수평선이 저 멀리있었고 광안대교가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모래사장에 배낭을 세워두고 신발도 벗어둔 채 파도가 들어오는 해변을 걷고 달렸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맨발로 모래사장을 밟아 보는 것 같은데, 오랜만에 느낀 모래의 감촉은 색달랐다. 발을 내딛으면 까슬한 모래가 닿지만 조금 있으면 내 발가락사이로 모래가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옆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은 아직 5월이라 그런지 조금 차가운가 싶었지만 이내 적응하여 시원하다 느낄 정도였다. 밀려왔다 다시 쓸려가는 바다를 따라서 왔다 갔다 하다가 바지가 다 젖었어도, 청춘 영화의 한 장면을 따라 해보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손붙잡고 같이 웃으며 해변을 달린 것도, 해변에 왔으면 모래에 하트 하나는 필수라며 모래사장에 하트를 그렸던 것도. 모든 게 너무나도 완벽했던 나의 소중한 친구와의 첫 여행이었다.
이후 낙지 탕탕이를 꼭 먹고 싶다던 친구의 말에 주변 회 센터에 가서 낙지와 모둠회를 주문했다. 분명 잘렸는데도 움직이는 낙지의 모습과 참기름과 먹으니 더욱 맛나던 모둠회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찾아 떠났던 부산 여행은 힘들었던 일상을 잊게 해주는 시원한 여행이었다. 아무래도 여행지를 잘 선정한 것 같은 생각을 했다. 역시 청춘 여행의 꽃은 바다니까….
그 짧지만, 강렬했던 5월의 부산 여행을 난 잊지 못하고 그 뒤로도 부산을 더 찾았다. 아무래도 1박 2일은 부산을 다 느끼기에는 아쉬운 것 같아서 다음 여행부터는 길게 다니기 시작했다.
6월 여행의 콘셉트는 #워케이션이었다. 요즘 떠오르는 또 하나의 여행 트렌드 아니겠는가. 워케이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왜 여행까지 가서 일을 할까’라는 생각했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워케이션을 하게 된 나는 왜 워케이션이 떠오르는 트렌드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경치가 좋은호텔에 묵은 것도 아니고 5성급 호텔에 묵은 것도 아니지만 비록 셋째 날부터 비가 심하게 와서 밖은 보지도 못했지만 직접 경험해 본 워케이션은 같은 일이라도 장소가 달라지면 마음이 달라지는 느낌인 것 같다. 서면에 숙소를 잡고 오전에는 노트북을 켜 할 일을 하다가 오후에는 서면에 나가 이리저리 구경을 했다. 굳이 대단한 호텔, 대단한 일정이 아니어도 익숙했던 주변 환경을 바꿔 주는 것만으로도 같은 일을 할 때 받던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비가 온 밤에도 빗소리를 들으며 평소와는 다른 공간에서 일하니 집중도 더 잘 되는 느낌이었다.
7월 여행의 콘셉트는 #엄마랑 단둘이 였다. 이렇게 좋았던 부산을 나 혼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야구를 좋아하던 엄마에게 올스타전을 같이 보러 가자고 하였다. 엄마의 ‘좋다’는 대답을 받자마자 호텔부터 기차표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마친 뒤 기대를 잔뜩 안고 기다렸다. 할머니가 부산 야구를 좋아하셔서 어린 엄마를 데리고 경기를 보러 다니셨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를 모시고 야구 경기관람을 다닐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어찌됐든 나도 엄마도 태어나서 처음 본 올스타전은 너무 재밌었고 귀여운 마스코트들과 마지막에 아름답던 불꽃놀이까지 모든 게 완벽했던 경험이었다. 어릴 적 가족과 여행을 곧잘 다니던 것과는 달리 올해 혼자서 여행을 너무 많이 다닌 터인지 엄마랑 안 맞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벌써 내가 이만큼 컸구나’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엄마랑 단둘이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의 일 때문에 길게 여행하진 못했지만 다음번에는 꼭 더 긴 여행을 함께하고 싶었다.
8월 여행의 콘셉트는 #classic.is.best 이다. 8월에도 어김없이 부산으로 여행을 오게 되었다. 너무 부산을 자주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테지만, 나는 이전의 세 여행에서의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부산을 제대로 ‘관광’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관광을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가슴 아픈 역사 속 장소들도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다. 몇 년 전에도 이 버스를 타고 부산항 대교를 올라갔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이번에도 부산항 대교를 경유하도록 동선을 짰다. 그때는 이렇게 빙글뱅글 돌면서 올라가는 게 그렇게 무서웠었는데 지금은 무섭다기보다는 재밌는 느낌에 가까웠다. 버스 옆자리에서 만난 6살 남자아이는 너무나도 귀엽게 ‘누나 누나’하면서 재잘재잘 떠드는데, 혼자 하는 여행의 좋은 친구가 돼주었다. 비도 내리지 않던 하늘에 갑자기 뜬 무지개도 나를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남포동을 구경하니 말로만 들었던 국제시장, 깡통시장을 만나볼 수 있었고 영화의 중심 BIFF광장도 걸어볼 수 있었다. 소개하는 멘트에서는 명동과 비슷한 동네라고 하던데 나는 명동과는 색다른 느낌에 더 눈길이 갔다. 오후에는 그린라인을 타고 바쁘게 움직였다. 흰여울문화마을에 내려 바다를 보며 마을길을 걷는데 햇빛도 예쁘게 비춰주는 것이 유럽 여행이 안 부러울 정도였다. 파란색으로 색칠된 마을의 모습이 마음을 더욱 시원하게 해주었다.
다음은 오륙도 스카이워크에 내렸다. 덧신을 신고 유리 바닥을 걸으니 정말 무섭긴 했다. 그래도 아래로 파도가 치는 모습과 멀리 오륙도가 함께 보이는 경치가 예술이었다. 망원경으로 저 멀리까지 봐주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평화공원에서 내렸다. 사실 평화공원은 일정에 없던 곳이었는데 버스의 안내 음성만 듣고 갑자기 방문하게 된 곳이다. 평화공원의 탑만 보고 바로 보고 싶었던 UN기념공원으로 이동했다. 미리 찾아본 바로는 전 세계 유일의 유엔 평화군 기념묘역이라고 한다. 그 공간은 함부로 말소리도 내기 어려울 정도로 엄숙하고 경건해지는 곳이었다. 나라별로 갖춰진 묘역을 지나 신원 미상인 분들의 묘역앞에서는 가슴이 더 먹먹해졌다. 또 여러 나라의 국기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볼 때도 가슴이 먹먹했다. 마감시간 전 아슬아슬하게 입장해 간단히 보고 나온게 아쉬울 정도로 뜻깊고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올해만 벌써 4번의 부산 여행을 했다. 하지만 부산이라는 곳은 알면 알수록 가면 갈수록 보고 싶은 것들이 더 생기는 동네라 머지않아 다시 또 방문할 계획이다. 스무 살이 되고 친구랑 떠난 첫 여행의 그 바닷가,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일하던 6월 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엄마를 모시고 떠난 여행, 부산의 생활도 문화도 역사도 다 느낄 수 있었던 관광까지. 다양한 콘셉트로 즐긴 도시 부산은 나의 스무 살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잊지 못할 도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