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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테마

바다 위 원도심 영도 로컬리티와 재생의 여정을 시작하다

글 _ 부산도시공사 시설재생처 배연한

부산의 원도심은 일반적으로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를 지칭한다. 원도심 4개 구는 북항과 남항을 마주하며 바다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고, 바다라는 환경적 요인이 도시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 중 영도구는 부산항의 중심에 위치해 남·북항의 천연 방파제 기능을 하며 부산항이 발전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섬이기는 하지만 육지와 불과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영도구는 원도심과 부산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과 지원을 해왔으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번 글에서는 익숙한 명칭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영도의 이야기에 대해서 원도심과 함께 알아보려고 한다.

1900년대 초반 원도심과 영도 © 자료: 부산역사문화대전 누리집
현재 원도심과 영도

목마장에서 절영도 도시로 변화 영도구

영도는 동삼·영선동의 패총으로 짐작하기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외항과 접하고 있어 부산포와 마찬가지로 왜구의 약탈과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겪으면서 사람이 살지않는 공도空島로 남아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영도는 조선 말기까지도 국영목마장으로 널리 이용되었으며, 중앙정부가 관리했던 육송조림지의 하나였다. 경상좌수영에서 건조하는 군선이나 동래부가 왜관을 신축·개축하는 데 필요한 공용 목재도 영도에서 채벌되었다. 영도의 지명도 목마장의 말이 그림자를 끊을 정도로 빠르다고 하여 절영도絶影島로 불리다가 광복 후 영도구(1957)로 불리게 되었다.
포산항견취도(1881)와 같이 영도는 자연환경이 우세한 경관을 보이다가 1876년 개항 이후 현재 도시경관에 이르기까지 불과 100년의 세월도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급격한 도시화의 모습은 자력은 아니었지만, 개항 이후 부산의 근대 도시화 과정과 일본이 부산을 계획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도시계획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의미가 있다.

포산항견취도 1881 © 자료: 부산고지도(2008), p238
영도 항공사진 © 자료: 싸이트플래닝

영도와 원도심이 현재의 도시경관을 가지게 된 주요 원인 중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개항’과 ‘인구 유입’이었다. 강화도 조약에 의해 자력은 아니었지만, 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장으로 각국의 조계지가 있었으며, 광복 이후 귀환 동포, 6·25전쟁의 피란민, 경제개발시기에는 일자리를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산 최초의 도시계획은 1937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이었는데 계획수립 당시 1937년 인구 213,142명을 기준으로 하여 목표연도인 1965년 계획인구를 40만 명으로 수립하였다. 하지만 귀환 동포와 피란민의 유입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증가로 1945년 약 28만 명이었던 인구는 1955년에 이미 100만 명을 넘었으며, 1968년에는 150만 명, 1972년에는 200만 명, 1979년에는 300만 명을 돌파하였다.1) 삼십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구가 열 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 증가는 선행적인 도시계획보다는 문제에 대해 처방하는 도시계획의 결과를 낳았다. 특히 다양한 일자리와 교통, 행정의 중심이었던 원도심으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고 현재와 같은 고지대 정주지역과 산복도로라는 부산만의 도시경관이 만들어졌다.

1) 부산광역시 도시계획사(2004), p11
1960년대 산복도로 © 자료: 부산동구청 누리집
현재 산복도로

우리나라 조선업의 출발지 ‘영도’

영도대교를 넘어가다 보면 자갈치시장 맞은편에 ‘대평동’이란 지역이 있다. 대평동은 개항 초기부터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을 조선업과 관련한 산업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대평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선업의 발상지이다. 근대식 조선업은 동력의 사용 여부에 따라 구분하는데 1912년 ‘다나카조선소’가 대평동으로 이전하면서 근대식 조선업의 시작을 열었으며, 현재까지 같은 자리에서 조선소가 운영 중이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선박이 목선이었고 동력의 사용은 선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영도의 조선산업은 빠르게 성장하여 1936년 전국의 55개 조선소 중 약 절반이 영도에 있었고, 전국 조선소의 18%가 대평동에 있었다. 기록상 영도 최초의 조선소는 1897년 영도로 이전한 ‘나카무라조선소’로 다나카조선소 옆에 위치했다. 1934년 나카무라조선소는 100t급의 목조선 ‘다이코쿠마루’를 건조했는데, 당시에 건조된 동력선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2) 이후 원양어업과 해운업의 성장으로 조선업도 발전하면서 영도에 최초의 강선 전문 현대식 조선소가 설립되는데 현재의 한진중공업이 그 자리이다. 설립 당시의 명칭은 ‘조선중공업주식회사’였으며, 강선 제작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이 ‘도크3)’를 설치하였다. 현재는 선박의 대형화로 인해 최초의 도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2) 대평동 민속지Ⅰ, p116
3) 선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기 위해 물을 채우고 뺄 수 있는 조선소 시설
다나카조선소 © 자료: 신편 부산대관(2010), p397
우리나라 최초의 도크 기념비

대평동 지역과 도시재생사업

대평동 지역은 바다와 접하는 부분에는 선박을 끌어 올려 외부 수리를 할 수 있는 조선소가 위치해 있고, 조선소 배후에는 선박의 내부 기관을 수리할 수 있는 공업사가 위치해 있다. 이렇게 한 지역에서 선박을 끌어 올리고 내부 수리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대평동의 경쟁력이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조선산업이 유지되었던 만큼 기술력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고치지 못하는 선박도 대평동에서는 수리할 수 있었으며, 기술자들은 해외에서 출장 요청을 받기도 했다.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던 대평동 지역의 수리조선업은 선박의 대형화와 해외시장의 경쟁 심화로 점차 쇠퇴해 갔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도시재생’이란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었고 침체해 가던 대평동 지역에 도시재생지원사업이 이루어졌다. 시작은 2015년 ‘부산시예술상상마을’ 공모에 ‘영도깡깡이예술마을4)’이 선정되면서이다. 이 사업을 통해 대평동은 수리조선업의 흔적과 기억을 남기고, 지역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를 발판으로 2019년에는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뉴딜사업에서 경제기반형 사업유형으로 선정되는 성과를 낳기도 하였다. 경제기반형 뉴딜사업은 대평동 지역의 수리조선 산업을 고도화하기 위해 기술지원, 장비지원, 공간지원, 인력양성지원 등 지역 기반산업을 활성화시켜 도시재생을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업의 목적은 사업명이 잘 표현해 주고 있다(“근대 조선산업의 1번지, 대평동 해양산업의 혁신기지로 전환하다.”). 사업 신청 주체는 부산광역시, 부산도시공사,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며, 그 중 부산도시공사는 부산시로부터 거점시설(조선해양복합센터) 및 현장지원센터 운영을 위탁받아 도시재생사업의 기반 구축 및 활성화를 위해 현장에서 지원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4) 배의 하부에 붙어있는 각종 부착물과 녹이나 부식이 된 부분을 망치로 제거할 때 ‘깡깡깡’ 소리가 난다고 하여 ‘깡깡이 마을’로 불린다. 현재는 망치 대신 그라인더 등으로 대체되었다.
대평동 수리조선업 조선소 © 자료: 싸이트플래닝
대평동 수리조선업 단지 © 자료: 싸이트플래닝

로컬리티와 재생을 향한 여정

개항장은 다른 나라의 문화, 기술, 사람, 물류 등이 처음 들어오는 곳으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영도는 앞서 소개한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와 도크, 패총, 목마장, 육송조림지 외에도 최초의 고구마 시배지, 최초의 도개식 연륙교인 영도대교, 태종대 등 지역 정체성을 형성할 자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도시의 기능변화, 경기침체 등의 요인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 지역은 쇠퇴하고, 일부 시설은 낙후되고 있다. 그럼에도 영도에는 도시재생사업과 같은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기존의 보세창고였던 봉래동 창고군이 형태는 유지한 채 새로운 기능으로 변화했다. 창고가 카페, 레스토랑, 전시 및 이벤트 공간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경관이 우수한 지역에 카페들이 들어서며 ‘커피 섬’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었으며, 동삼동 지역에는 아르떼뮤지엄, 피아크 등이 들어서며 새로운 공간과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영도 커피 페스티벌 포스터 © 자료: 영도구청
봉래동 창고군에 위치한 ‘블루포트 2021'
북항재개발, 동삼혁신지구, 청학동 영블루벨트, 롯데타워, 철도지하화 등 영도와 원도심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시점에서 영도가 정체성과 독창성을 가진 글로벌 강소도시로 가기 위한 새로운 개항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 참고문헌

  • 1. 부산광역시(2004), 부산광역시 도시계획사
  • 2. 부산광역시, 국립민속박물관(2020), 영도 대평동 민속지 Ⅰ, Ⅱ
  • 3. 영도구청(2003), 절영향토지
  • 4.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2010), 신편부산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