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는 동삼·영선동의 패총으로 짐작하기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외항과 접하고 있어 부산포와 마찬가지로 왜구의 약탈과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겪으면서 사람이 살지않는 공도空島로 남아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영도는 조선 말기까지도 국영목마장으로 널리 이용되었으며, 중앙정부가 관리했던 육송조림지의 하나였다. 경상좌수영에서 건조하는 군선이나 동래부가 왜관을 신축·개축하는 데 필요한 공용 목재도 영도에서 채벌되었다. 영도의 지명도 목마장의 말이 그림자를 끊을 정도로 빠르다고 하여 절영도絶影島로 불리다가 광복 후 영도구(1957)로 불리게 되었다.
포산항견취도(1881)와 같이 영도는 자연환경이 우세한 경관을 보이다가 1876년 개항 이후 현재 도시경관에 이르기까지 불과 100년의 세월도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급격한 도시화의 모습은 자력은 아니었지만, 개항 이후 부산의 근대 도시화 과정과 일본이 부산을 계획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도시계획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의미가 있다.
포산항견취도 1881 © 자료: 부산고지도(2008), p238
영도 항공사진 © 자료: 싸이트플래닝
영도와 원도심이 현재의 도시경관을 가지게 된 주요 원인 중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개항’과 ‘인구 유입’이었다. 강화도 조약에 의해 자력은 아니었지만, 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장으로 각국의 조계지가 있었으며, 광복 이후 귀환 동포, 6·25전쟁의 피란민, 경제개발시기에는 일자리를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산 최초의 도시계획은 1937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이었는데 계획수립 당시 1937년 인구 213,142명을 기준으로 하여 목표연도인 1965년 계획인구를 40만 명으로 수립하였다. 하지만 귀환 동포와 피란민의 유입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증가로 1945년 약 28만 명이었던 인구는 1955년에 이미 100만 명을 넘었으며, 1968년에는 150만 명, 1972년에는 200만 명, 1979년에는 300만 명을 돌파하였다.1) 삼십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구가 열 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 증가는 선행적인 도시계획보다는 문제에 대해 처방하는 도시계획의 결과를 낳았다. 특히 다양한 일자리와 교통, 행정의 중심이었던 원도심으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고 현재와 같은 고지대 정주지역과 산복도로라는 부산만의 도시경관이 만들어졌다.
1) 부산광역시 도시계획사(2004), p11
1960년대 산복도로 © 자료: 부산동구청 누리집
현재 산복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