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숲과 험준한 바위들로 둘러싸인 수정산 일대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호랑이들의 은신처였다. 수정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한 호계천 역시 목마른 호랑이가 갈증을 해소하던 생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혼란 속,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몰려온 피란민들이 부족한 땅을 대신해 험난한 산세를 따라 흐르는 호계천 옆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호랑이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천하를 호령하던 호랑이는 종적을 감췄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이곳은 호천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나무가 우거진 산골짜기를 종횡하던 호랑이가 개울가에 서서 물을 마시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기억 속 호랑이는 친숙하면서도 용맹한 수호신이었다. 각종 설화에 등장해 풍자와 해학을 담당하기도 하고, 한국을 상징하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마 그래서일까. 실제 호랑이가 나타나던 호천마을에도 대자연을 제패하던 기운이 남아있다. 지금은 사라진 호랑이의 자취를 따라 마을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옛이야기 속에서 우리와 동고동락하던 호랑이가 떠오른다. 마을 곳곳에 잠재한 호랑이의 위엄과 기백은 주민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그런 호랑이의 수호 아래에서 삶의 안정을 찾은 듯한 아늑하고도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호랑이의 숨결이 깃든 마을의 공기 속에서 한국의 기개를 천명하던 담대하고도 강인한 기운과 마을을 지키려는 따뜻하고도 굳건한 의지를 느껴본다.
호천마을이 전국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건 2017년, 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부터다.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주인공들의 청춘과 열정은, 역사의 상처 속에서도 삶을 재건하려 했던 호천마을의 모습과 닮아있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며 함께 울고 웃었고, 이러한 공감의 물결은 마을을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호천마을은 마을 활성화를 위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2020년 부산도시공사의 도시재생뉴딜사업에도 선정돼 본격적인 도시재생을 시작했다. 기존의 도시재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물리적 환경 개선뿐 아니라 주민들의 역량 강화를 통해 마을을 ‘종합적으로 재생’한다는 점이다.
이번 도시재생 사업은 거주 환경 개선에서 나아가 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주민역량강화 프로그램 운영, 리빙랩을 통한 마을 브랜드 및 관광 굿즈 개발 등 주민들 스스로가 마을 활성화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호천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이야기와 경험, 공동체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호천마을의 역사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마을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호천마을의 소중한 자산이자, 진정한 지역 사회의 의미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이 겹겹이 쌓인 마을 본연의 가치는 지키면서도 주민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잇는 것. 도시공사가 ‘도시재개발’이 아닌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호천마을을 개편하는 이유이다. 도시재생의 근간이 되는 ‘법고창신’의 정신이 마을의 오래된 골목을 따라 자연스레 퍼져나간다.
마을주민들이 걸어온 역사는 고즈넉한 골목에 시간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알록달록 칠해진 색색의 집은 피란민과 노동자, 지역민이 혼재한 호천마을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뒤죽박죽 붙여 놓은 이음새지만, 그 틈새 사이사이에 애달픈 정서와 애틋한 연정이 흐르고 있다. 180개의 단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단 하나에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고, 단 하나에 가파른 인생의 굴곡이 스며있다.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던져놓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아이들의 즐거운 소란이,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고단한 발걸음을 옮기던 가장의 무거운 숨결이 계단 곳곳에 스며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던 무수한 발자국을 따라 호천마을의 기억과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진다.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 빼곡하게 자리 잡은 집들. 얼기설기 세워진 집들로 구성된 작고 소박했던 마을은 어느새 운명의 풍랑 속에서도 삶을 지켜낸 희망의 터전이자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이웃과 서로의 세계가 스며든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그들이 맞닿은 순간순간은 실타래처럼 엮여, 그물망처럼 촘촘히 연결된 거대한 삶의 일부가 되었다. 기술은 진보해도 사람은 남는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묵묵한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지켜주는 것은 언제나 곁에서 함께하는 사람이다
해가 저물어갈 때면 호천마을의 본격적인 회우가 시작된다. 저마다의 일상을 보내던 주민들은 하나둘씩 마을의 중심이 되는 호천문화플랫폼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시간 약속은 필요하지 않다. 밤낮없이 놀러 가도 나의 친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어린 시절 놀이터처럼, 그곳에 가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네 이웃이자 오랜 벗들이 있다. 동네 사랑방이 따로 있으랴. 평상에 앉아 노래 한 곡만 틀어놓아도 그곳은 어느새 피서지이자 안식처가 된다. 밤의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노란 전구 아래 피어나는 이야기꽃과 함께 달빛의 그림자를 만나볼 수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는 말이 맞을까. 호천마을을 보고 있으면 급속한 발전을 이룬 세상만사는 모두 딴 세상 이야기 같다. 천천히 유영하는 시간 속에서 그네들의 청춘, 살아온 삶의 궤적이 소박한 터전에 행복을 그리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을 비추는 등불처럼, 호천마을의 불빛은 과거와 오늘,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다. 어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따스한 불빛은, 오늘의 밤을 채우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마을을 포근하게 다독여주는 어스름한 노을빛처럼 다시금 시작될 황혼의 청춘을 밝혀본다.